좀비캣

  • 동인/ 내 디자인이 범죄에 공모했을 때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해요. 몇 년 전엔 어떤 미술 공간과 네 번 협업했는데, 그곳에서 받은 첫 메일은 2021년 6월, 워크숍 홍보물 디자인 문의였어요. 당시엔 디자인 학부의 휴학생이었고, 가까운 관계에서 디자인 작업이 일어나던 때라 외부에서 온 최초 의뢰였어요.

그 공간은 “저희는 성북동 삼양로에 개관한 '사가'(SAGA)”라고 운을 떼며 예술의 교육학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자세하게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라며 웹사이트, 소셜 미디어 채널, 미술지에 실린 기사 링크를 전달했어요.

사이트에는 지난 전시와 공동 운영진들이 소개되어 있었고, 미술지에 비친 공간의 모습은 근사해 보였어요. ‘사가 님 안녕하세요‘하며 답신으로 일을 수락했고, 같은 해 9월 공간에 방문했을 때, 사가를 대표해 나온 ‘이양헌'을 대면하게 됩니다.

이후 일을 진행하는 동안, 그를 만날 일이 계속해서 생겼어요. 독특한 점은 그때마다 달라지는 그의 지인(들)이 있었고, 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와 단체 숙박 자리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양헌으로부터 두 차례 성추행 피해를 당했어요. 당시에도 불쾌했지만, 이것이 성추행 피해임을 자각하지 못해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은 채로 지냈습니다. 이로부터 몇 달 뒤 이양헌은 다른 일로 공론화의 대상이 되었고, 그는 잠적합니다.

일 년쯤 지나 알고 지내던 분께 어떤 미술 행사의 디자인을 맡아 줄 수 있겠냐고,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메시지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한 가지를 추가로 질의하셨는데, 이양헌과 일한 적 있냐는 질문이었어요. 그 일을 함께 준비하는 선생님들이 지적해서 조심스럽게 물어본다고 하셨어요. 틀린 말은 아니니 그렇다고 했어요. 어느 시기에 이런 일의 디자인을 맡았고, 그의 소식은 모른지 좀 됐다는 말과 함께요. 제겐 포트폴리오처럼 쓰는 소셜 미디어랑 블로그가 있는데, 그때는 사가의 디자인도 몇 점 있었고, 아마도 그것이 확인됐던 듯해요. 책임도 재미도 있어 보이던 그 일은 결국 하지 못했어요. 그 팀과 일정이 살짝 안 맞기도 했지만, 그런 지적이 나왔다는 사실을 안 순간, 모르는 새에 소멸한 직업적 기회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맴돌았어요. 그 이름이 오래 따라다니지 않을지 하는… 주로 미술계 주변에서 일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어요. 주위에서 사가 관련 디자인은 내리기를 조언했고, 그렇게 모든 작업을 감췄습니다.

얼마 뒤, 이양헌이 적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반복해 왔다는 범죄 사실을 ‘미술계 성폭력에 반대하며: 진실과 회복을 위한 연대’(이하 ‘미술계 성폭력 반대 연대’)가 공론화했어요. 자신이 꾸린 술자리 이후 단체로 숙박하는 자리에서, 특히 신진 미술인을 대상으로요.(링크) 공론화된 범죄의 환경과 수법 모두 경험과 같았고, 심각한 일임을 느껴 저의 피해 사실 또한 제보했습니다.(링크)

이 제보에서는 피해 경험에 부쳐 두 가지를 더 얘기했어요. 하나는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성폭력 사건을 함께 주시하며 논의하자는 것. 또 하나는 창작물의 가치를 회복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감추었던 사가 관련 포트폴리오를 되돌려 놓으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디자인으로 생활비를 만들어 보던 초창기의 작업이라서 개인적인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피해자로 공공연하게 명시되기에는 두려웠고, 창작자로서도 낙인처럼 남지 않을까 주저했어요.

지금은 그 결정이 의심스러워서 글을 쓰는 것 같아요. 내 창작물이 범죄에 공모했을 때, 창작자는 이것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 반복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보통 어떤 디자인 결과가 윤리적으로 문제 삼을만하다면 (예외가 있으나 대체로) 디자이너와 의뢰인 모두에게 과실이 있지만, 행사 자체가 사후적으로 문제시되는 경우에 디자이너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는 대체로 난감한 상황인 듯해요. 

실제로 디자이너들의 포트폴리오에는 노동자의 죽음으로 내몬 기업의, 노조를 탄압한 단체의, 성폭행 가해자가 관여했던 일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요. 어떤 디자인 팀은 의뢰자가 비윤리적인 기업이면 거절한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프로젝트 착수 전에는 몰랐거나 일어나지 않았는데, 끝난 이후 프로젝트 또는 의뢰자의 부조리가 밝혀진다면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사례를 찾아 보고 싶었어요. 좋은 텍스트를 알며 적절하게 인용할 능력은 부족하지만, 몇 가지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하나는 브레이브 뉴 휴먼(2024)이 재현 윤리로 지적받았을 때, 어떤 독자가 출판사에 책을 절판시키지 말 것, 다만 문제의 부분을 수정하고 사과하며 해당 사안을 밝히는 방법을 얘기한 글이 생각나요. “이미 출간된 출판물을 굳이 폐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하기보다 더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며 그 출간물을 더 큰 이야기의 일부로서 그 중요성을 축소시켜나가는 형태로 대화”해 나가야 한다며 장은정 평론가는 더 많은 논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어요. 그것이 ‘사과 후 절판’ 또는 ‘침묵과 비호’ 둘 중 하나로 사건이 소멸하지 않는 길일 것 같았어요. 미술계 성폭력 반대 연대에서도 공론화 당시 “성폭력 사건은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만 남아 사건 자체가 추문으로 묻혀버리고 모두가 사라지는 양상이 흔하게 반복 (……) 이양헌의 성폭력이 어떻게 7년 이상 지속되었는지, 회복과 예방은 어떻게 가능한지, 각자의 입장을 공유하고 섬세하게 구별해야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덧붙인 바가 있었고요. 이때 창작자가 창작물을 어떠한 방식으로 책임질 것인지에 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아요.

다른 장면 하나는 이후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큰 참고가 되었어요. 디자인 회사 ‘슬로워크’의 동물권 단체 ‘케어’의 브랜딩 포트폴리오에서 발견한 글이에요.

안녕하세요. 슬로워크입니다.

슬로워크는 2017년 ‘동물과 인간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케어의 신념에 공감하며, 함께 브랜드 경험을 설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이 경험은 슬로워크와 케어에게 모두 좋은 자산이 되어, 저희는 그간 슬로워크 홈페이지를 비롯한 다양한 채널로 이를 알려 왔습니다.

하지만, 진실탐사그룹 셜록에서 지난 1월 11일부터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케어 박소연 대표와 관련한 기사는 동물권을 존중하는 케어의 신념과 크게 어긋나있습니다. 슬로워크는, 특히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우리의 동료들은 이번 사태를 보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안타까움과 참담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슬로워크가 케어의 브랜드 경험을 설계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케어 프로젝트는 저희가 그간 알려온 대로, 수많은 고민과 시간을 들여 만든 훌륭한 결과물입니다. 이후 벌어진 논란에서도 분명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케어에는 600여 마리의 동물이 함께하고 있다고 합니다. 논쟁이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영문도 모른 채 추운 겨울을 보내며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기만 합니다. 말 못 하는 동물의 대변자로서 언제나 동물의 편에 서겠다는 케어의 다짐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하루빨리 이 사태가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2019.1.15. 슬로워크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보도한 지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슬로워크는 2년 전의 포트폴리오에 윗글을 덧붙였어요. 디자인 결과물을 과거에 남기지 않고 현재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상황과 조건은 다르지만, 개구리 페페(Pepe the Frog)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원작 작가가 나서서 권리를 되찾고자 한 사례여서요. 페페가 만화책에서 발굴된 이후로 인셀 커뮤니티 밈 정도였는데, 2020년 전후에 대안우파와 트럼프 캠프에서 각종 혐오에 활용하자 페페를 세계관에서 사망 처리하기도 해요. 이후에는 나아가 뉴라이트 언론사 등에 소송을 걸며 페페 악용을 저지하는 방향으로 가요.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면 마냥 무시하는 건 능사가 아니죠.”

이제껏 사가 관련 디자인을 남겨두는 것이 낙인이라고 생각해 감추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이 작업을 했다는 사실도, 피해자라는 사실도 감추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사가 관련 작업을 어딘가에 게시할 때면 그곳에는 아래 문구가 따라다니게 하고 싶어요. 디자인 결과가 노동의 증거만이 아닌 사건의 증거로도 남게끔요.

해당 디자인을 의뢰한 ‘사가’의 운영자인 이양헌의 성범죄가 2024년 4월, 피해자 연대를 통해 최초 고발되었습니다. (instagram.com/ against_sexual_harass) 이양헌은 피해자가 미술계에서 활동을 막 시작했던 신진 작가/디자이너라는 점을 노려 범죄를 저지르고, 피해자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범죄를 은폐하고 피해자를 고립시켜 왔습니다. 어떤 성범죄도 은폐되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회복과 안전을 바랍니다. 아울러, 미술계와 이웃한 분야에서도 이양헌의 성범죄가 가능했던 조건을 충분히 살피면 좋겠습니다.
떠들어 놓고 결국 되돌릴 작업물에 몇 줄 덧붙이고 싶다는 것으로 끝나지만요. 작업물을 개인의 수치에서 공동체의 기록으로 옮기겠다는 말이자 디자인한 이미지를 탈맥락화/탈정치화하지 않겠다는 반성이기 때문에 공유할만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비롯해 많은 기획자, 비평가, 디자이너가 이양헌과 행사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중 몇 명은 지금도 이양헌의 이름을 지운 채 활동해요. 앞으로도 우리의 창작물은 새로운 부조리와 계속해서 얽힐 것이 분명한데, 우리는 이것을 공동체에 어떻게 남겨야 할지 계속해서 논의하면 좋겠어요.

글쓴이: 민동인
2018년경부터 한국에서 문화/예술/출판/운동과 관련해 벌어진 몇 가지 일에 그래픽 디자이너로 참여했습니다. 능란한 수행과 그 밖에서의 아마추어다움을 좇습니다. www.mindongin.info